가. 光州盧氏 恕 祖派 入鄕史
문간공(文簡公) 소재 선생이 일찍이 중시조(中始祖:恕)를 중심으로 1582(執喪期)년 [광산보략(光山譜畧)]이라는 가첩(家牒)을 닦아 놓은 것이 우리 파(派) 최고의 보첩으로 여기에 근거하여 지금까지 모든 족보를 정리하여왔다.
곧 대호군(大護軍:恕) 아들이 광정대부(匡靖大夫) 좌우위대호군(左右衛大護軍) 단(亶)으로서 고려시대에 치사(致仕:연로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였고 손자인 지평공(持平公) 준경(俊卿)은 고려 말기의 허약한 국력으로 인해 왕이 원(元) 사신들의 사술(詐術)에 빠져 충혜왕이 포박당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위협에 다른 신하는 모두 도망갔으나 왕이 고통을 호소할 때 공(公:俊卿)은 왕을 끝까지 보필하다가 원의 사신들의 칼에 돌아가셨다.
지평공의 아들 경평공(敬平公:嵩)은 성품(性稟)이 순후한 가운데 효행을 겸비했는데 포은(鄭夢周) 선생의 사사를 받아 절의(節義)로 두문동(杜門洞:고려의 유신들이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으려고 함께 들어가 문을 닫고 지냄)에 들어갔을 것이나, 향우(鄕友)이며, 지략가인 호정 하륜(河崙)의 간절한 권유에 따라 뒤늦게 조선 건국의 공신 대우를 받았다. 태종 때는 집현전 대제학과 검교우의 정으로써 기로소에서 편안한 가운데 예우로 만년을 보내셨다. 아들은 오형제인데 상인, 상의, 상예, 상지, 상신(仁, 義, 禮, 智, 信)이다.경평공의 맏아들 양근공(陽根公:尙仁)은 양근군수로써 당시 상주(尙州)의 망족(望族)인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선생의 외손자이며 화령(化寧)에 살던 고원(高遠) 판서공의 사위가 되어 상주 화령으로 낙향하여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의 일이다.
양근공의 손자 중추공(知中樞府事公 德基)은 세조(世祖)의 동서(同壻)로서 50여 세에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한 것이 사제문(成宗의 賜祭文)과 점필재(佔畢齋:金宗直)가 지은 지명(誌銘)에 있으며, 중추공의 장자 합천공(陜川郡守 熙善) 자손이 상주 성주에 번성하고 차자 금산공(金山郡守 熙淑)의 자손이 경기, 정주, 금릉, 화순에 번족하다.합천공의 손자 찬성공(贊成公 珝)은 20여 곳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서울 남산(乾川)골에 터를 잡아서 후손의 번영을 도모하였다.
공(찬성공)의 손자인 소재(穌齋 守愼) 선생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정승(左右 領議政)으로 14년간 선조(宣祖)를 보필하여 선정(善政)을 펴는데 진력하셨다. 소재 선생의 아드님 난로당(難老堂:大海)과 차자(次子 戒來), 삼자(三子 戒難)의 후손들이 상주에서 긍지를 가지고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유지를 받들어 사당, 묘소, 유물을 아끼고 보전에 힘쓰고 있다.소재 선생의 아우 후제공(厚齋 克愼)의 아들 이천공(利川府使 大河)은 임진왜란 후 대동법(大同法)을 가장 먼저 시행하고 선정하여 이천에 비(碑)가 서있으며, 이천공의 장자 야로당(野老堂 道立)은 돌아오는 공(功)을 초개(草芥)같이 던진 징사(徵士)로써 후학을 양성했고, 차자 주부공(主簿公 道凝)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군(淸軍:청태조 군)을 막다가 순국하였다.
삼자 함열공(咸悅縣監 道一)의 자손이 선산에 터를 잡아 살며 혁혁하고, 오자 중추부사공(中樞府使 道行)의 자손이 역시 번성하고 있다.소재 선생의 손자 예천공(醴泉郡守 道亨)은 청빈과 정직으로 이름이 있었고, 장자 생원공(生員公 碩命)은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요절(夭折:일찍 죽음)했다.
차자 안변공(安邊都護府使 峻命)의 자손은 울산과 예천등지에 번성하며, 삼자 봉화공(奉化縣監 景命)의 후손은 문경등지에, 사자 학산공(鶴山公 佑命)의 자손은 울진에서 이름을 얻고 있다. 한편 이룡방(二龍房) 공조참의(工曹參議 尚義)의 후손은 상주에서 다시 전라도 장흥에 입향했는데 공의 손자인 광원공(光元公 毅)은 종묘사직을 지킨 공이 컸고, 광원공의 장자 사헌공(司憲公 自元)의 후손은 주로 나주에서 번성하고, 차자 긍재(肯齋) 대사성(大司成 自亨)공의 후손과 삼자 사간공(司諫公 自貞)공의 후손은 장흥에서 번족하며 혁혁하다.
삼룡방(三龍房) 통정대부 호조참의(通政大夫 戶曹參議 尙禮)공의 5대손 개성 유수공(乙振)은 벼슬을 물러나서 함경도 함주(咸州:함흥)땅으로 갔으나 그 후예 일부가 평창에 살고 있다고 전한다. 사룡방(四龍房) 충청경력공(忠淸經歷公 尙智)은 강원도 쪽에 낙향하였는데 6세손 안정(安鼎)공이 연산군 때에 성균관 태학생으로 있을 때 연산군의 폐위(廢位)를 주장하는 상소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강원도 간성(杆城)에서 군역(軍役)을 치르던 중 1506년에 중중 반정으로 죄가 풀렸으나 벼슬을 버리고 양양에 정착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러서 빈빈하다.
오룡방(五龍房) 판관공(判官公 尙信)의 후손은 파주, 광주(廣州)를 중심으로 서울근교에서 벼슬이 끊이지 않았고, 이조참판공(吏曹參判公 漢文)은 아들 5형제를 두어 모두 벼슬길에 올라 당시에 혁혁하였으나 인목대비 외가로 지목되고 정쟁에 몰려 충주, 괴산, 제천, 예천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지금도 파주, 광주, 충주에 살며 관계에 진출하거나 사업으로 번성한 후손이 많다.
한편 후대에 강화도 전등사에서 발견된 「광주노씨 세계(世系)」는 역사에 밝은 노도양(道陽)박사가 확인 했거니와 시조(始祖 穗) 그리고 광주백(光州伯 垓)에서 중시조(中始祖 恕)까지 세계와 그 배위(配位 즉 부인)까지 일일이 밝힌 귀중한 자료로써 이제까지 노씨 보첩 중 가장 오래고 확실히 연원을 밝힌 주요한 문적(文籍)으로 약간의 문제는 있으나 광주노씨의 세계를 밝혀서 앞으로 후대에 확실한 근거로서 한 획(劃)을 그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둔다.
參考文獻: 1.光州盧氏族譜, 2.文集, 3.高麗史, 4.尙州郡誌, 5.全南道誌
나. 光州盧氏(恕祖派) 世系圖
다. 行 列 表(恕祖派)
派 別 |
24世 |
25世 |
26世 |
27世 |
28世 |
29世 |
30世 |
31世 |
32世 |
33世 |
34世 |
35世 |
36世 |
37世 |
38世 |
39世 |
40世 |
一龍房 |
○九 |
炳○ |
○均 |
鎭○ |
○澤 |
東○ |
○煥 |
埈○ |
○錫 |
永○ |
○植 |
炯○ |
○在 |
鉉○ |
○源 |
杜○ |
○熙 |
二龍房 |
炳○ |
○基 |
鍾○ |
○河 |
權○ |
○煥 |
坰○ |
○鉉 |
源○ |
○彩 |
熙○ |
○載 |
錤○ |
○淳 |
秉○ |
○燮 |
珪○ |
〃 |
炯○ |
○圭 |
鎬○ |
○徹 |
東○ |
○焄 |
瑄○ |
○鈺 |
溶○ |
○楫 |
煦○ |
○培 |
錡○ |
○泌 |
楨○ |
○煌 |
綵○ |
三龍房 |
炳○ |
○基 |
鎬○ |
○源 |
東○ |
○煥 |
奎○ |
○鉉 |
溶○ |
○彩 |
炯○ |
○載 |
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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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龍房 |
炳○ |
在○ |
○鉉 |
承○ |
○采 |
然○ |
○均 |
鍾○ |
○浩 |
根○ |
○煥 |
奎○ |
○錫 |
源○ |
○秀 |
烈○ |
○培 |
五龍房 |
然○ |
○均 |
鍾○ |
○河 |
權○ |
○焄 |
瑄○ |
○鉉 |
源○ |
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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