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東遷)과 정착(定着)
1. 동천(東遷)의 배경(背景)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동천(東遷)한 수(穗) 할아버지의 세계(世系:대대로 내려온 계통)는 아직 밝혀진 문헌(文獻)들이 아직 없어 계통적으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우리 선조(先祖)들의 기록들을 참고해 보면, 수(穗)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휘(諱)가 홍표(鴻表)이고 당(唐)나라에서 서주자사(徐州刺史)를 지냈고 그의 아버지 휘(諱) 진순(震順)은 연주자사(兗州刺史)를 지냈다고 한다.
자사(刺史:州의 知事)를 지낸 할아버지는 당(唐)나라 말기의 인물로 한림학사(翰林學士:唐나라 때 임금의 詔勅의 초(草)하는 것을 맡은 벼슬)와 상호군(上護軍:軍職의 하나. 3품)을 겸직(兼職)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비롯 왕선지(王仙芝), 주온(朱蘊), 황소(黃巢) 등이 잇따라 난리를 일으켜 당(唐)나라는 국운(國運)이 기울고 세상이 시끄러워짐으로 벼슬하던 사람이나 일반 백성들도 난리를 피하여 여러 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특히 반란군(叛亂軍)들은 당나라의 세도가(勢道家)와 높은 벼슬아치들을 무차별 학살(虐殺)하고 약탈(掠奪)하였으므로 당나라에서 명문갑족(名門甲族)으로 이름 높았던 대부분의 노씨(盧氏)들도 할 수 없이 난리를 피하여 금문도(金門島), 안휘(安徽), 강소(江蘇), 강서(江西), 절강(浙江), 복건(福建), 서광(西廣), 운남(雲南), 대만(臺灣) 등 동남아(東南亞) 쪽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때에 수(穗) 할아버지는 아들 아홉 형제를 거느리고 팔학사(八學士)와 함께 한반도(韓半島)로 동천(東遷:동쪽으로 옮김)하게 되었는데 그 경로(經路)에 대하여 두 가지 설(說)이 있다.
노씨 각파 문중(盧氏各派門中)의 족보(族譜)와 기타 문헌(文獻) 등을 살펴보면 육로(陸路)로 하여 요동반도(遼東半島)를 거쳐 뗏목(乘桴)을 타고 패수(浿水:지금의 鴨綠江, 大同江, 淸川江 등)를 건너 왔다고도 하며, 일설(一說)에는 배(船)를 타고 바다를 건너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능리(菱里)에 정착(定着)하여 잠시 살다가 평안남도 용강(龍岡)의 쌍제촌(雙梯村)으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그 시기(時期)는 당(唐)나라 말로 9세기 중엽(中葉) 무렵이다.
註: 팔학사(八學士) - 任積, 陸種, 盧穗, 田秋, 徐稱, 蘇穫, 朱稷, 閻稽
2. 구관봉백(九貫封伯)
우리나라 노씨의 시조(始祖)인 수(穗) 할아버지는 쌍제촌에 정착하여 살면서 아들 9형제에게 정의롭고 참된 인간이 되도록 교육하였다. 이때가 신라(新羅) 52대(代) 효공왕(孝恭王)이 즉위(卽位)하고 있을 때로서 효공왕은 동경(東京:지금의 경주)에서 수(穗) 할아버지를 국빈(國賓)으로 극진히 예우(禮遇)하였다.
이 무렵 신라도 국운(國運)이 점차 기울어가고 있었고, 남쪽에서 후백제(後百濟)가, 북쪽에서는 태봉(泰封)이, 또 만주지역에서는 발해(渤海)가 그칠 사이 없이 신라를 침공하였다.
국빈 대접을 받고 있던 수 할아버지는 아들 9형제와 함께 신라의 정치, 경제 및 사회 안정에 기여하고 주변국들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큰 공(功)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신라의 왕실(王室)에서는 이들의 공적(功績)과 수(穗) 할아버지가 원래 중국의 명문갑족(名門甲族)임을 생각하고 9형제에게 9관(九貫)을 봉백(封伯)하게 되었다. 해(垓)는 광주백(光州伯), 오(塢)는 교하백(交河伯), 지(址)는 풍천백(豐川伯), 구(坵)는 장연백(長淵伯), 만(만)은 안동백(安東伯), 곤(坤)은 안강백(安康伯), 증(増)은 연일백(延日伯), 판(坂)은 평양백(平壤伯), 원(垣)은 곡산백(谷山伯)에 봉백되었다.
수(穗) 할아버지가 한반도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살기 시작한지 1,1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나라 노씨들은 일근만지(一根萬枝)로 번성(繁盛)하였고, 기나긴 역사 속에서 대통령과 많은 재상 그리고 수많은 높고 낮은 관리(官吏)들과 충신열사(忠臣烈士), 효자(孝子)와 열녀(烈女), 학자(學者)들을 배출하였다.
오늘날에도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분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수많은 노문(盧門)의 후손들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모두 뿌리 깊은 나무의 가지가 무성하고 아름다운 꽃과 알찬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구백봉관(九伯封貫)
參考文獻: 1.盧氏各派世譜 및 先世實紀, 2.盧氏族譜, 3.中國盧氏史略, 4.中國通史, 5.炎帝神農傳略, 6.太公望傳略,
7.六韜, 三略, 8.中華盧氏源流, 9.華夏呂姓四千年, 10.姜太公志, 11.中華姓氏譜(盧姓卷), 12.六祖壇經講義
삼릉단(三陵壇)
1. 설단유래(設壇由來)
우리 노씨(盧氏) 삼릉단(三陵壇)은 1910년 일제(日帝)의 강제합방(强制合邦)에 이은 조선식민지(朝鮮植民地) 폭정(暴政)에 대한 한민족으로서 항거(抗拒)하기 위하여, 훌륭한 종족(宗族)으로서 조상(祖上)을 숭모(崇慕)하고 일가돈목(一家敦睦)을 기(期)하고자 수시조(穗始祖) 및 구백조(九伯祖)의 단소(壇所)를 1926년에 설단(設壇)하였다.
본장(本章) 제2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조(始祖)인 수(穗) 할아버지는 당(唐)나라 말엽(9세기 中葉)에 아들 9형제(兄弟)를 거느리고 멀리 중국(中國)에서 한반도(韓半島)의 평안북도(平安北道) 정주(定州)의 능리(菱里)에 기착(寄着)하였다.
그 후 평안남도(平安南道) 용강(龍岡)의 쌍제촌(雙悌村)으로 옮겨 살았다.
아들 9형제(兄弟)는 모두 신라시대(新羅時代)에 크게 공(功)을 세워 신라로부터 아홉 관향(貫鄕)으로 봉백(封伯)되었으나 오랜 역사와 잇따른 외침(外侵) 그리고 병화(兵火)로 선조(先祖)들이 남긴 문적(文籍)과 유물(遺物) 등의 소실(消失)은 물론 수(穗) 할아버지를 비롯한 구백(九伯) 할아버지의 묘소(墓所)마저 실전(失傳)되었다.
후손(後孫)들로서는 참으로 죄만(罪萬)스러움과 통한(痛恨)을 금(禁)할 길이 없다. 이에 만시지감(晩時之感)은 있으나 일제치하(日帝治下)의 어려운 시기(時期)에도 불구(不拘)하고 우리 노씨전통(盧氏傳統)을 보존하며 조상을 숭모(崇慕)하고 은혜(恩惠)에 보본(報本)하는 뜻에서 9파(派) 문중(門中) 어른들이 뜻을 모아 상론합의(相論合議)하여 단소(壇所)의 설단에 이르게 된 것이다.특히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대눌공(大訥公) 상익(相益), 송해공(松海公) 문규(汶奎), 소해공(蘇海公) 종룡(鍾龍), 죽계공(竹溪公) 만식(萬植)이 주축(主軸)이 되어 각 파(派)로부터 모금 설단에 따르는 소요자금을 마련하였으며, 설단사업(設壇事業)을 추진하는 실무진으로 춘강공(春崗公) 문영(文永)이 총무를 맡고 의당공(毅堂公) 진영(軫永)이 재무를 맡았다.
이후 삼릉단(三陵壇)의 내력은 본 책자 부록 2 삼릉단(三陵壇) 대종회(大宗會) 연혁(沿革)에 수록되어 있다. 설단(設壇) 이후 현재까지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세일사(歲一祀)로서 전국 9파 문중의 제자손(諸子孫)이 모여 삼릉단(三陵壇) 대제(大祭)를 올리고 있다.삼릉단(三陵壇)의 위치(位置)는 호남의 대도(大都)인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북구(北區) 오치동(梧峙洞) 산(山) 109번지(番地)이다.
동(東)으로는 7㎞ 지점에 죽물명산지(竹物名産地)인 담양군(潭陽郡)이 접(接)해 있고 서쪽으로 곡물여나주(穀物如羅州)가 19㎞ 지점에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南)으로 8㎞ 안팎에 화순(和順)과 12㎞ 지점에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 있고 그 중간(中間)에 삼릉단(三陵壇)이 있다.
예부터 풍수지리학설(風水地理學說)에서 이르기를 삼릉단(三陵壇)의 위치(位置)가 금계포란형국(金鷄包卵形局)으로 군왕지지(君王之地)라 하였다. 그리고 삼릉단(三陵壇)은 호남(湖南)의 명산(名山)으로 꼽히는 삼각산(三角山)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나주(羅州)의 금성산(錦城山)을 안산(案山)으로 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영산(靈山)인 무등산(無等山)을 조산(祖山)으로 하여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의 국(局)을 이루었고 좌향(坐向)은 양좌곤향(良坐坤向)으로 서석산(瑞石山:一云 無等山) 북(北)쪽에 위치한 호남제일(湖南第一)의 명당(明堂)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단소(壇所)의 명칭(名稱)을 삼릉단(三陵壇)으로 부르게 된 것은 단소(壇所) 뒤를 병풍(屛風)처럼 받히고 있는 산이 삼각산(三角山)이며 이곳 옛 지명이 삼릉(三陵) 또는 능안동(陵案洞)이라 불리어 왔으므로 삼릉단(三陵壇)이라 이름 하게 된 것이다(山名三角而洞稱陸案故曰三陵).
2. 위치 배열도(位置 配列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