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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수 신(盧守愼)
1. 생애(生涯)
나. 流配生活
소재(穌齋) 선생이 유배(流配)를 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연이어 일어난 양재역(良才驛) 벽상서사건(壁上書事件:문정왕후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정권을 마음대로 하니 나라가 망하는 것은 서서도 기다릴 수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原文:女王執政于上 奸臣 李芑等 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侍 豈不寒心哉) 明宗實錄 卷62) 때문이었다.
을사사화는 외척(外戚)들 간에 권세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었다. 즉, 장경왕후(章敬王后)는 인종(仁宗)을 낳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명종(明宗)을 낳았는데, 장경왕후와 관계된 외척은 윤임(尹任)을 대표로 하는 대윤파(大尹派)이고, 문정왕후와 윤원형(尹元衡)을 대표로 하는 소윤파(小尹派)였다.1544년 중종(中宗)이 죽고, 세자 때부터 성군(聖君)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분으로 알려져 상하(上下)로부터 기대를 모았던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파는 유관(柳灌), 이언적(李彦迪), 유인숙(柳仁淑) 등을 신임하여 소윤파를 축출하고 제거하였다.
인종(仁宗)이 8개월 만에 병으로 죽자 인종의 이복동생이었던 명종(明宗)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문정왕후가 섭정(攝政)을 시작하였다. 이에 윤원형, 이기 등 소윤파는 권세를 잡고, 대윤파의 대표인 윤임과 좌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 등을 죽이고, 이언적, 소재 선생 등 인종의 신임을 받고 충성을 다한 사람들을 축출하였는데, 이때에 죽거나 귀양 간 사람들이 76명이나 된다.
이것이 역사상 네 번째이자 마지막 사화(士禍)였고, 이 사화로 너무나 많은 충성스럽고 양심적인 선비들과 학자들이 박해(迫害)를 받았다. 그러나 윤원형 등의 소윤파는 을사사화로도 아직 자신들의 정치에 반대하는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다시 양재역 벽상서사건을 일으켰다.
소윤파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을사사화에서 겨우 살아남은 양심적인 선비들과 학자들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1547년(明宗 2)년 소재(穌齋) 선생이 유배될 때의 나이는 불과 33세였고, 진도(珍島)에서 19년간,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2년 반 동안, 모두 21년이 넘는 세월을 타향(他鄕)에서의 유배생활로 보냈다.
소재(穌齋) 선생은 어려운 유배생활 속에서도 지조(志操)와 자신의 사상(思想)을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발전과 학문연구, 저술활동(著述活動), 진도의 도민에 대한 교화활동(敎化活動), 후진양성 등에 힘을 쏟았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행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先生의 인간상(人間像)을 재조명해 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배생활을 할 때 소재(穌齋) 선생은 진도 지력산(智力山) 기슭, 거제포변(居濟浦邊)에 모옥(茅屋:풀로써 지붕을 이은 집) 3칸(間)을 손수 지어 ‘穌齋’라는 현판을 달고 이 집에서 경사(經史)를 연구하였으며, 1545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로 있을 때 동궁(東宮:왕세자 仁宗)에게 강의하였던 내용들을 [서연강의록(書筵講義錄)]으로 편찬하였고, 중국 송나라 진무경(陳茂卿)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풀이하여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지었다.
1955년에는 정서몽(程瑞夢)의 [자훈(字訓)]과 중국 남송(南宋)의 대학자인 주희(朱熹)의 [동몽수지(童蒙須知)]를 풀이하여 [동몽수지해(童蒙須知解)]를 지었고,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과 [집중설(執中說)]을 저술하였다.
또한 퇴계(退溪) 선생을 비롯 많은 학자들과 서신(書信)으로 학문을 토론하였고, 주옥같은 2천여 편의 시(詩)와 부(賦)를 남겼다.
1) 島民의 敎化
선생은 마음이 울적할 때면 보전포변(寶田逋邊)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상일을 잊었고, 봄ㆍ가을로는 읍내(邑內) 유배등(流盃登)에 올라 자연을 벗 삼아 시름을 달래기도 하였다. [소재입안지지(穌齋入安之地)]를 보면, 선생이 발자취를 남긴 데가 향동안산(香洞安山), 거망허(擧網墟), 굴포포변(屈浦浦邊), 항도포변(項島逋邊), 세포(細浦), 세방포변(細傍浦邊) 등인데,
선생은 칠재오천(七載五遷)이라 이름 지어 일곱 곳의 낚시터와 다섯 곳의 처소를 돌아다니며 마음을 달래고 진도 도민의 교화(敎化)에 힘썼다고 한다. 또한 이들 처소마다 서당(書堂)을 설치하고 청소년들에게 직접 학문을 강의하였고, 부모들의 교육열을 북돋아 주는 등 후진교육에도 정열을 쏟았다고 한다.
穌齋釣臺:先生이 19年間 流配生活 中 때때로 낚시했던 곳
所在:全南 珍島郡 知山面 安峠里 산너머
소재(穌齋) 선생은 높은 학문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양(謙讓)하고 소박(素朴)한 몸가짐을 보여 도민들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그 명성이 매우 높아 멀리 육지(陸地)에서도 천리길을 멀다 않고 소재선생에게 배움을 청하러 오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강복성(康復誠), 김천일(金千鎰), 나사율(羅士慄), 노대하(盧大河) 등이 있었다.
진도에 유배됐을 때만 해도 섬사람들에게는 혼례의 예절이란 것이 없어서 남의 집 규수를 칼을 들고 강제로 빼앗아 오는 약탈결혼식이 성행(盛行)하고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민들을 깨우쳐 주어 예법(禮法)을 익히게 하였다. 그 결과 진도에서도 혼인의 예식이 생겨났고, 좋지 못한 풍속(風俗)들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지은 행장(行狀)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선생의 후덕(厚德)에 힘입어 훗날 선생의 후손들이 조정의 어지러운 당파싸움을 피하여 이곳에 옮겨왔을 때 진도 도민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와 같은 선생의 업적 때문에 진도 사람들은 현재에도 소재(穌齋) 선생을 진도의 개화지조(開化之祖) 또는 교민지조(敎民之祖)로 평가하고 있다.
2) 人間佳話(珍島郡誌)
소재(穌齋) 선생의 조카 중에 노대하(盧大河)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백부(伯父)를 무척 존경하고 사모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을사사화로 유배생활의 고난을 당하게 되자 백부를 따라 진도에 와서 함께 동거하며 백부의 시중을 들었고, 학문에도 크게 통달하였다고 한다.
백부를 따라 진도에 올 때 노대하(盧大河)의 나이가 19세였으니, 백부를 위해 평생을 희생한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노대하(盧大河)는 선생이 유배생활에서 풀려나게 된 후인 1574년(宣祖 7)에 현령(縣令)에 제수(除授)되었다.
3) 槐山으로 移配
1565년(明宗 20)년 소재(穌齋) 선생은 형량(刑量)이 감해져서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忠北 槐山郡 七星面 沙隱里)로 이배(移配)되어, 허름한 초가(草家:현재의 水月亭)를 손수 짓고 그 집에서 학문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567년에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갔던 선비들을 사면(赦免)시키자 선생도 21년이 넘는 유배생활을 벗어나게 되었다.
※ 수월정(水月亭)
소재(穌齋) 선생이 손수 지었다는 이 허름한 초가집은 남한강 상류의 조그만 섬 위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섬의 뒤편에는 강을 낀 절벽이 우뚝 솟아있었고 섬 주위가 구곡(九曲)을 이루었다고 한다. 선생은 이 집에서 1년 반 남짓 적거(謫居:귀양살이)하였고, 선생의 후손들과 주민들에 의해서 보존되어 오면서 수월정(水月亭)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1950년 괴산댐 공사로 인하여 원형 그대로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부속건물은 옮겨지지 못하였다. 수월정을 옮길 때 지붕만 기와로 바꿨다.
先生의 謫居所였던 水月亭
괴산댐 수몰로 이전, 본래 지점에서 100m 정도 이전됐고 처음 수월정이 서있던 섬이 물 위로 보인다.
(忠淸北道記念物 文化財指定74호, 忠北 槐山郡 七星面 沙隱里)
처음 수월정이 서 있던 섬은 강물이 줄어들 때에만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수많은 학자와 선비들이 유배생활을 하였지만, 현재에까지 적거소(謫居所)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거의 없다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수월정과 같은 원형의 적거소는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1986년에 충청북도 도지사(道知事)로 부임한 노건일(盧健一) 지사가 수월정을 보호하고자 지방문화재로 지정하고 많은 예산을 지원, 수월정을 보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