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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司憲 自元의 墓 所在:全南 長興郡 夫山面 金子里 金莊山 |
▣ 노 자 원(盧自元)
자(字)는 대숙(大叔), 호(號)는 운암(雲庵),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경평공(敬平公) 숭(嵩)의 6세손이고, 광원군(光原君) 의(毅)의 맏아들이다.
일찍이 노우명(盧友明)과 함께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다.
공(公)은 어릴 적부터 타고난 재질(才質)이 뛰어나 학문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향리 사람들은 자형(自亨), 자정(自貞) 등 이들 3형제를 당(唐)나라 때 설씨삼봉(薛氏三鳳:당나라 때 설수(薛收), 원경(元敬), 덕음(德音)의 높은 학문과 인품을 지칭하는 것)에 비유하기까지하였다.
22세의 약관(弱冠)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에 올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이조좌랑(吏曹佐郎),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이르렀다.
그러나 노부모(老父母) 봉양(奉養)을 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을 제수 받게 되었다. 그 후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랐으며 공(公)은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여러 차례 간곡한 소(疎)로 올려 비로소 임금의 윤허(允許)를 받아 전라도 장흥(長興)의 부춘산(富春山)속에 들어가 초막(草幕)을 짓고 산수(山水)를 벗 삼아 노래와 시(詩)를 지어 읊으면서 여생을 마쳤다.
공(公)이 벼슬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어 기묘사화(己卯士禍:조선 중종 14년(1519)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소장파 사림(士林)들이 중종반정에 공신의 호를 받은 자에 대한 훈적(勳籍)을 삭제하는 등 과격한 정치를 하여 훈구파인 남곤, 심정이 공모하여 화를 일으킨 것)가 일어나 평소 교우(交友)하던 조광조(起光祖), 김정(金淨) 등이 화(禍)를 입게 되자 모두 공(公)의 견지명(先見之明)에 놀랐다 한다.
參考文獻: 光山盧氏世譜